마야가 환영이라는 사실은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경험들이 환영이라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잘 이해하여야 하는 것은
환영이니 그냥 막 살아도 된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다.
인류의 수많은 발전과 기여, 그리고 각 인간을 고양시키고 고취시킨 인간의 삶이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말한 것처럼 의식 수준이 500으로 높게 측정되는 강아지, 고양이의 순수한 모습에
모든 인간이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인간은 의식 성장을 이루는 쪽으로 나아가는 존재이지,
반대로 의식 수준이 내려가는 쪽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인류를 소중히 여기고, 또 인류에 기여하며 각자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존재라고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 세상이 매트릭스다, 이 마야가 환영이라는 말들이 많이 들리고 있고,
그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음에도 실제로 그런 것 같다는 데 공감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해오고, 발전해오고, 이렇게 흘러온 패턴이 있으며,
예수, 부처, 그 외에도 간디, 크리슈나무르티 등 현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을 보면,
이런 패턴과는 어쩌면 다른 양상으로, 아니 이 패턴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존재했었다.
삶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를 패턴으로 인식해 본다면, 모든 인간의 삶에 어려움이 발생한다.
인류는 패턴이고, 매트릭스라는 전제 하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어떤 형태가 되든 지나가게 된다.
이 또한 모든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패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각 인간에게 달리 나타날 수 있는 패턴은
누군가는 그걸 수용하고, 그 어려움을 완전히 넘어서고,
누군가는 그걸 수용하지 못하고, 평생 그 고통과 함께 한다.
그걸 넘어선 사람은 마치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순수한 모습에 인간이 끌리듯이,
어떤 순수성을 유지하게 되고,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끌려 간다.
반대의 경우는 삶을 부정하고, 의식 수준이 더 낮아지는 쪽으로 강제로 폭력적이 된다.

누군가 내 소지품을 훔쳤고, 내가 그 범인을 알게 됐다고 하자.
보통은 그 범인에게 죄를 묻고, 벌을 받게 하고, 소지품을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마야가 환영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본다면,
그가 내 소지품을 훔친 것은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 그가 소지품을 훔친 사실에 반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사실에 반응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이며, 뜬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주라고 한 예수의 말은,
오른쪽 뺨을 맞았으니, 그 사실에 입각하여 나의 억울함을 밝히고, 그의 잘못됨을 밝혀내는 것과 같이,
마야에서 일어난 사실에 대해 사실로 대응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환영 이면의 진실에 대응하고 있음을 느껴볼 수 있다.
바이런 케이티, 데이비드 호킨스도 같은 맥락에서 말을 했던 것 같다.
마야라는 환영을 걷어 내고, 그 이면의 진실을 느껴본다면,
내게 지금 풀리지 않는 답답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마야라는 환영에서 나타나는 패턴이라는 사실을 인지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진실은 나의 존재가 있고, 그리고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일 뿐,
그외 이 환영에 나타나는 일들과 다른 존재들의 필연성을 알 수 없고,
이 환영과 나의 존재와 나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항상 공존했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가 반대 쪽 뺨을 내주라고 한 것은 나의 존재, 나의 생각에 대한 부분이며,
남의 존재, 남의 생각에 대한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마야를 살아가야 한다. 마야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삶의 진실, 삶의 비밀은 마야라는 환영에서 찾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나, 나의 생각에 있을 수 있다.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 않는가.
사진: Unsplash의 Planet Volumes
사진: Unsplash의 Kevin Mu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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