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地名)
홍주(洪州)는 홍성(洪城)의 옛 지명이다.
일제강점기에 홍주(洪州)가 공주(公州)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일본은 지명 개편을 추진하였고, 홍주(洪州)군과 이웃해 있던 결성(結城)군과 하나로 묶었다.
홍주의 ‘홍’, 결성의 ‘성’을 따서 홍성(洪城)이라 하였다.
이에 홍주(洪州)로 지명을 환원하는 게 올바르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이 있으나, 여러 행정과 경제적 이슈로 추진 중에 있는 상태다.
지기(地氣)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고려시대 공민왕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2 그루다. 나이는 650년~8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나무 둘레가 6.6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옛날부터 홍주 고을에 큰 재앙이나 액운이 찾아올 것 같으면 느티나무가 밤새 슬프게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느티나무가 울면 고을 사람들은 서둘러 대비책을 마련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고려시대부터 관아 건물들이 위치해 있었고, 지금도 조선 시대 사또가 일하던 안회당과 연못 속 정자인 여하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는 홍성군청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도 이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뿌리 뽑지 못하였다. 1895년, 1905년 두 차례나 대규모 홍주의병이 일어났던 거점 지역이고, 지역 주민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는 이 나무를 제거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우려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민속적 신앙, 미신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던 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물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만큼이나 굳고 올바른 역사적 인물들이 홍성에서 나고 자랐다. 지기란 건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최영 (崔瑩, 1316~1388)
성삼문 (成三問, 1418~1456)
김좌진 (金佐鎭, 1889~1930).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홍주순교성지(洪州巡敎聖地)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시점은 1784년으로 본다. 휴먼 디자인 글로벌 사이클 관점에서 정말 놀랍지 않은가.
당시 천주교 신자의 40~50%가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홍주목 관할인 아산만, 삽교천 일대가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고, 농업, 수산업, 상인, 천민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에, 양반 중심의 한양과 달리, 평등사상에 대한 높은 호응과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여진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유입한 포문을 연 지역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복자로 선포된 인물은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4명이다. 홍주에 많은 순교자들이 아직까지 복자로 선포되지 못했다.
또한 위에 기록한 홍주의 지기를 고려했을 때, 뿌리 깊은 뚝심, 흔들림 없는 지조와 같은 부분들이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어 온 것 같다.
홍주의병(洪州巡敎聖地)과 홍주성 전투


1차(을미의병, 1895년~1896년):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었다. (김복한, 이설, 안병찬 등)
당시 조선 조정은 이를 반란군으로 보았다. 친일 개화파 내각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12월(추정), 조정에서는 홍주성을 점령한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고, 홍주의병 내 배신자가 관군과 결탁하면서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었다.
그러나 1896년 02월 11일 06시(=아관파천), 한양에서 친일 개화파 내각은 국민들에 의해 처단되었고, 고종은 이틑날 02월 12일 10시, 의병들을 해산시켰다(=친유칙서 의병해산령 발표)


2차(을사의병, 1906년): 1905년 을사늑약이 계기가 되었다. (민종식 중심) 1906년 05월 19일 오후 4시경 시작된 홍주성 전투에서 20일 새벽 홍주성을 점령하지만,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에게 05월 31일 다시 함락된다.

현재 정식 명칭은 홍주읍성이라고 한다.
당시 어린 김좌진 장군은 1,2차 홍주의병을 보며 자랐다. 이런 배경이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링크에 홍성 내 이미지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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